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좋은 시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가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를 구분하는 안목이 없었다. 좋다고 표현되는 시에서 무엇이 좋은 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때는 그냥 내 감성을 울리는 시를 좋은 시라고 여겼던 지극히 편협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이다. 내 감각이나 내 인식을 깨우는 시라면 좋은 시로 여기는 것은 너무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이었다. 이러한 자의적인 선택은 결국 나의 아집으로 시를 바라보게 하여 좋은 시를 판별해낼 수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사람들이 좋은 시라고 하는 시들의 좋은 점을 발견해낼 수가 있었다. 그것은 시들을 많이 섭렵한 이후의 일이었다. 그만큼 좋은 시를 구별해내는 일은 주관과 자의적 판단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도 검증이 될 수 있는 시를 뽑아내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전을 읽는다. 그 오랜 시간동안 검증에 검증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시를 고르는 기준이야 천차만별이라 할 수 있다.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좋은 시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다소 지났으나 나름의 검증의 세월을 거친 시 몇편을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이다. 목계나루를 공간적 배경으로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이 시의 좋은 점을 꼽으라 한다면 우선 유랑하는 사람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로 표현되는 객체가 요구하는 것은 ‘구름’이 되는 것이며, 땅이라는 객체가 요구하는 것은 ‘바람’이다.
‘하늘’이나 ‘땅’으로 대표되는 것의 의미를 분석하자면 하늘은 권세있는 자, 내지는 힘 있는 자와 땅은 보통
사람이나 힘없는 자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위, 아래에서 모두 구름이나 바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상황
이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인 셈이다. 바람이나 구름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녀야 하는 유랑을 의미한
다. 정착의 삶을 버리고 유랑을 할 수 밖에 없는 곤경에 직면한 것이다. 이는 시가 씌여질 당시 산업화로
농토를 잃고 도시로 쫓겨나는 농민을 의미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분석한다. 농민들의 절박한 상황을 시의
모티브로 삼아 그 절박함을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장치를 하여 표현하므로 의미를 풍부하게 해석할 여지
주고 있는 것이 또한 이 시의 좋은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유랑은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질 뿐만 아니라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숙명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농민들의 고달픈 삶의 현실과 애환을 토로하고 있는 시다. 유랑자들에게는 많은 것이 서럽다.
그래서 보통은 모두들 좋은 볕이라고 여기는 가을볕도 서럽다고 표현하고 있다. 편히 앉아 쉴 수 없는
자에게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앉아 쉬는 일은 그대로 애환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두 행에서 ‘바람’이 되어야 할지 ‘잔돌’이 되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바람은
유랑을 의미하지만 잔돌은 가난한 정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삶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래의 시는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이에게」라는 시이다. 잘 알다시피 이 시는 무관심하게 생각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소외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으며 관심을 가져 그들도 기쁨이
함께 나누자는 표현을 하고 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는
가마니에 덮힌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는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 가겠다
슬픔을 너에게도 주겠다는 것은 슬픔을 함께 나누자는 의미이다. 그것은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귤 을 깎으며’ 기뻐하던 너와는 대조되는 상태이다. 바로 이점이 이 시가 좋은 시라고 서슴없이 말하게 한다.
슬픔을 주겠다는 역설로 나눔의 삶과 관심의 삶을 일깨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슬픔을 주는 것
은 슬픈 것일 뿐이지 않는가. 슬픔을 준다고 슬픔이 당장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시인은 슬픔을 주겠다고 표현하면서 사실은 ‘슬픔을 나누자’는 내포적 의미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기쁨과 동일한 의미로 슬픔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슬픔과 기쁨은 동등한 것으로 관심을 갖고 슬픔을 나누면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얼어 죽었는데
누가 얼어 죽었는지 왜 얼어 죽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는 기쁨이는 다시 그를 죽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내던져진 소외자들이 죽어갈 때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너에게도 기다림이라는 아픔
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며 얼마나 큰 아픔인가를 알게 하겠다는 의도이다.
어떤 슬픔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슬픔들 중 하나에게 다녀와서, 너무 추워 떠는 그들에게 다녀와서,
그들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하며 걷겠다고 한다. 천천히 걸으면서 그들이 얼마나 추웠을 것이며
얼마나 슬펐을 지를 ‘기쁨이’에게 말하겠다는 화자는 이 세상의 소외된 자와 가난한 자들의 슬픔에 동참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기쁨이’라고 표현한다. ‘슬픔이’라고 표현된 것보다 ‘기쁨이’라고 표현된 존재들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단어는 ‘기쁨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시에서 사용된 의미
는 대단히 부정적이다. 생각없이 무관심하게 이 세상의 슬픔에 대하여 눈을 감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비아
냥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기쁨이라고 표현되는 이들은 슬픔을 모르는 자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존재의 삶이란 슬픔과
기쁨이 교차되어 있는데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무사유를 꼬집고 있는 셈이다.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도 무관심이 얼마나 큰 희생을 초래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이히만의 무관심으로 수많은 죄없는 유태인들이 절규하며 죽어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무관심은 죄악에 가깝다고 할 만큼 큰 문제가 되었다. 무관심으로 인하여 희생되는 사람이 있으며 무관심으로 지독한 가난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린다 눈빛이 내린다
난 멀디먼 눈길 뒤에서 굴뚝새처럼 헤매었다
눈물 다 흘리고 아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 무심한 눈밭 그때 알아버렸다
컴컴하게 눈먼 하늘이 각혈하는 눈보라가
두고두고 이 세상 내 험한 눈길 속으로 가져다줄 눈빛을
그 눈시린 고통과 황홀의 눈빛을 그 후로
난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다 꿈속에서도 깨지 마라
깨지 마라 눈은 쏟아지고 눈뜨면 감은 눈 위로
거대한 설원이 기다림처럼 쌓이는 꿈을 꾸는 나를 보았다
아, 눈과 눈의 사랑 난 기어이 깨어났다
이 천지의 가물고 가문 숨소리 눈보라가
내 무거운 눈꺼풀을 벗겨갔다 난 보았다
그 무수한 눈송이가 무수한 눈물로 바뀌는 것을
눈은 땅으로 곤두박질치지만
눈물은 마침내 허공에 설원을 이룬다
눈발과 눈물의 가슴시린 부딪침, 사랑
눈이 쌓인다 눈빛이 쌓인다 밤새
나는 잠들지 못하리라 저 황홀한 눈빛이
내 눈에 영원한 고통을 족쇄 채웠다 눈이 펑펑 내린다
나는 눈빛 쌓인 설원을 저물도록 떠돌아야 하리라
눈은 녹지만 끝끝내 당신, 눈빛은 녹지 않은 설원을
눈이 내린다 눈물이 솟아오른다
눈이 펑펑 내린 날에 눈빛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쓴 유하의 「눈을 위한 시」로 슬픈 사랑에 관한 시이다.
눈이 오면 연인들은 즐거워한다. 눈길을 거닐기도하고 눈싸움을 하기도하고 사진을 찍으며 눈이 오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시인이 간파한 것은 아름다운 눈과 더불어 눈이 눈물처럼 곧 녹아버린다는 사실이었다.
눈은 눈물과도 같다는 동일시로 사랑이 얼마나 슬픈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눈은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
을 만들어 주었지만 사랑은 흘러가 버리고 눈이 내리는 날을 또 맞는다. 눈이 오면 잠들지 못하는 화자는
사랑의 상처뿐만 아니라 그 눈빛이 가져왔던 아름다운 기억을 교차시킨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빛깔과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오버랩되면서 아름다웠던 기억을 회상하는 것이다.
눈이 눈물로 변한다는 사실은 시인이 발견한 진실이다. 탐스럽고 하얀 성스러운 빛깔의 눈이 곧 모조리
눈물로 변한다는 것은 슬픈 사랑을 통째로 잘 말해주고 있다. 그 모든 눈이 모두 눈물이 되어 쏟아져 버리
는 슬픈 사랑이다. 슬펐던 사랑에 모두 눈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게 한다.
결국 이 시는 눈을 통해서 눈물을 발견한 시인의 통찰력에 큰 의미를 줄 수 있다. 눈빛 쌓인 설원을 저물도록 떠돌아야하는 아픈 사랑이 한껏 느껴지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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