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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단면 촬영이다.
조회 : 13,369
(사)푸른세…
2012.05.1407:44
시는 단면 촬영이다

김신영 / 본지 편집장

사진은 여러 가지 기법과 렌즈를 활용하여 촬영을 한다. 특히 접사촬영은 피사체에 1mm까지도 근접하여 초점을 잡을 수가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소설은 전면촬영이라고 하며, 시는 단면촬영이라고 한다. 이는 시가 내포한 특성을 간단하게 나타낸 말로 시는 사물이나 사고의 어떤 한 면을 자주 나타내므로 생겨난 말이다. 반면 소설은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경향이 많으므로 전면촬영이라고 하며, 이점이 시와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사진에서 피사체에 아주 근접하여 초점을 맞추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물을 구체적이고 미세하게 관찰하고 사고하며 근접하여 표현한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이는 시의 표현법과 아주 유사한 촬영기법이다. 시에서 사물은 미세한 떨림과 움직임까지를 포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백과사전적 지식까지 동반하는 특성을 갖기도 한다. 사물의 속성과 함께 사물이 가진 특성을 파악하려면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에서도 오류가 없어야 한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청개구리를 해부하였을 때 ‘김이 모락모락’난다고 표현하여 오류로 지적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이처럼 이치에 있어서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사물에 근접하여 단면 촬영을 하면 사물이 가진 특성이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최근에 의학에서도 X선 촬영이나, CT촬영을 활용하여 인체의 질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치료에 활용하고 있다. 사람이 가진 치명적인 질병의 요인을 구체적이고 세밀한 단면 사진을 통해서 밝혀내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도 이와 동일하게 단면 촬영기법이 도입된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의 모습은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관찰을 하면 그 사물이 가진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시의 진실’이 되어 시의 질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의 진실은 시의 질료인 언어로 표현되기에 앞서 이렇듯 구체적이고 세밀한 관찰과 사고의 과정이 필수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행, 위대한 나의 경작자
불행, 앉으라,
휴식하라,
내 너와 함께 잠시 쉬리라,
휴식하라,
너는 나를 발견하고, 시험하고, 증명한다.
나는 너의 붕괴

위대한 나의 연극, 나의 항구, 나의 아궁이,
황금의 지하실,
나의 미래, 진정한 나의 어머니, 나의 지평선,
너의 빛, 너의 폭, 너의 공포, 그 속에
내 몸을 맡기라

-앙리 미쇼, 「불행」 전문

흔히 ‘불행’을 우리는 추상적 요소라는 사고에서 시적 대상으로 여기며, 시로 표현하기에는 무리하다고 여긴다. 앙리 미쇼의 「불행」은 불행이라는 추상적 대상을 의인화하여 마치 친구 중 한 사람에게 대화하듯 말을 건네고 있다. ‘불행’이 가져온 갖가지 의미를 분석하고 세분화하며 극복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에서 불행은 복잡한 삶의 원초적 원인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불행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모든 문제를 단순한 시각으로 단면화 하여 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불행이 가진 속성을 간파하여 불행을 극복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극복의 대상은 불행이라는 존재를 온전히 체험하므로 얻어지는 여러 가지 경험적 측면에서 비롯되고 있다. 불행은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인 결과물의 원인으로 꼽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인 시점으로 볼 때에도 사람의 인생을 편하게 해주는 산물은 아니다. 그러나 앙리미쇼는 불행의 의미를 매우 단순하게 단면화하여 어렵지 않게 보물로 길 뿐만 아니라 ‘나’됨을 증명하며, ‘나’의 실험실이 되었음을 천명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를 흔들어 대던 바람은
한밤의 먼지에 불과했습니다
멀리서 손사래를 치며
우리를 맞이하던 몸짓은
태양같은 강렬로 가슴을 후벼 내었습니다만
그도 불볕에 사라지는 물기에 불과했습니다.
잊고자 누워 있던 바위에서 싹이 틉니다.
삶을 끊고자 버린 불모지에도 번뇌가 싹이 틉니다
내내 한 생각도 하지 않고자
오래 걸어온 길에
진을 친 거미줄이
아침마다 눈앞을 가립니다
떨쳐내고자 하여,
한 생각도 일어남이 없이
지극에 이를 수 있다던
경전의 말씀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노래한
긍휼로 남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청천같은 당신의 말씀은
하늘이 북새가 될 때에야
자취를 드러내었습니다.
덧없이 한 사람이 떠나고 나자
바람이 몹시 불었던 게지요
적멸에 들고자 하였던
멀리가지 못한 한 생각도
큰 바위 끝에 불콰한 빛깔로 남았습니다

-김신영, 「적멸(寂滅)」 전문

위의 시는 소유에 대한 사람들의 끝임없는 욕망을 시로 표현하여 소유와 욕망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진지하게 나타내고 있다. 무릇 소유란 사람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것을 비우기 위해 끝없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도 작은 빛살에 의존하여 욕망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묘사한 것이다. 사람의 욕망으로 인하여 자본주의는 지속가능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자유주의 시장체제는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며, 경제의 비약적 발전까지 공헌한 바가 매우 지대하다. 그러나 욕망은 끝없는 욕망을 불러와 산업사회의 문제점으로 대두된 지 또한 오래되어 이는 새로운 사회의 문제점으로 독소조항이 되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음을 잘 안다. 이 시에서도 이러한 독을 없애고자 소유를 무소유로 돌리고자 하나 멀리가지 못하고 다시 욕망에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화자를 만날 수가 있다.

모든 것이 소유에서 비롯된 잘못이고 오류이므로 바람도, 먼지도, 한 줌의 햇살까지도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별것 아닌 미물임에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인간의 갈등은 이제 아무생각도 하지 않고자 하는 무사(無私)에까지 이른다. 사람의 욕망이 단층적으로 너무나 구체적이고 시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로써 인간이 가진 속성이 파악이 되며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을 것임을 예견하게 되는 것이다.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김사인, 「노숙」 전문

사람의 삶은 어쩌면 ‘노숙’이라는 관점에서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나그네처럼 왔다가 가야하는 속성 때문에 우리의 삶은 ‘노숙’이라고 할 수 있다. 노숙하는 사람들은 지쳐 있으며, 쉴 곳 또한 마땅하지 않다. 그들은 인간생활의 기본적인 것이 문제가 되는 기본조차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 삶이 우리의 삶이다. 왕후장상의 삶을 누린다고 하여도 결국은 보잘 것 없는 남루한 삶을 제공하는 셈이다. 헌 신문지 위에 몸을 뉘여 놓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에서 지상에서의 삶이 불행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노고를 치러줄 삯은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한다. 결국 노숙하는 몸에게 ‘어떤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인생이 치쳐 보이고 갈 곳이 없으며 어떤 대가도 쳐 줄 수 없을 때 우리는 심층적이며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어떤가, 몸이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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