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물체는 해를 거듭하면서 자신이 가진 지혜의 노하우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진화를 계속하고있다. 인류도 인간의 축적물인 여러 기술과 과학을 다음세대에 물려주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데 공헌을 하고
있다. 이는 비단 생물체나 인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업의 영역도 해당하며 인류의 추상적 능력
과 아울러 이성적 능력, 그리고 예술적 능력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또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인류는 이제 ‘지속 가능한 개발’을 내세우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시가 하나의 예술 영역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예전의 시가 아닌 새로운 시의 모습
으로 태어나야 한다. 여기에 하나의 과제는 ‘지속’ 가능한 것이냐이다. 산업이 자연을 훼손하며 개발해야
한다면 이제 그 산업의 가치는 현저하게 떨어지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시도 시 자신만을 위한
시라면 그 가치는 평가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삼국시대에 발달하였던 향가가 고려시대에 와서 약간 호흡을 더하고, 조선시대에는 시조로 3․4조의 운율로 길어졌던 것이, 현대시에서 1920~30년대의 시보다는 1990년대의 시에서 보다 산문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시가 달라지고 있는 하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산문화 경향의 시는 산문시와는 다른 면
을 보이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경향을 발전이라고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
므로 여기에서는 시의 진화 부분만을 다루기로 한다.
시는 첫째 용어가 매우 달라졌다. 1990년대 이전의 시어가 서정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면 그 이후의 시는
시라는 장르에 각종 엽기와 욕설이 나타나는 이른바 시의 고결성과 서정성의 측면이 무시되는 시가 각광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한 시들은 문단에서 주목은 받았으나 독자를 확보하지는 못하였으므로 독자들의 평가
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러한 시들은 문단 밖으로 쫓겨나고 다시 ‘도시 서정’을 읊은 시들이
등장하여 지금의 시단을 이끌어 가고 있다. 지적 언어에 목마른 독자들은 감성적 언어를 가진 시보다는
철학과 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정을 간직한 시에 주목을 하여 현재 시단은 그런 시를 탐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독신자들 /박주택
어느덧 세월이었다. 눈과 귀를 이끌고 목마름에 서면
자주 가슴속을 드나들었던 침묵은 미처 못다 한 말이 있는 듯
가을을 넘어가고 열매만이 영웅의 일생을 흉내 낸다
저기 바람 불지 않아도 펼쳐지는 시간의 전집은
나의 것이 아니다 마른 잎이 끌리는 심장의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외침들은 나의 자식이 아니다
나는 다만 말의 잎사귀들이 서로의 몸에 입김을 눕힐 때
지팡이를 짚은 채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았을 뿐
어떤 뉘우침도 빛이 되지 못했다 고독한 문들이 기쁨을
기다리며 소유를 주저하지 않고 나를 다녀가 계절에게
홀로 있음을 누치 채게 하여 업신여김을 받는 동안
시간의 젖은 늘어지고 시간으로부터 걸어 나온 환멸만이
거리를 메운다 어느덧 평화에 수감된 목쉰 주름에 섞여
눈보라 치는 밤 결빙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언 몸을 녹이는
찻집 허름한 책을 비집고 나온 한 올 연기는
전생을 감아올리다 흰 문장으로 가라앉는다
시집 『시간의 동공』(문학과지성사, 2010) 중에서
위의 시는 산문화 경향의 선상에 있으면서 도시 서정의 공간과 철학적 이성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여 표현
되고 있다. 서정은 현대사회에서 겪는 서정으로 우리나라는 지금 90%이상이 도시화되었으므로 ‘도시 서정’
의 공간이 당연스레 등장한다. 이전의 시들은 자연적인 공간이나 고향의 공간을 많이 읊었으나 이제는 궁벽
했던 시골까지 도시화가 진행된 상태이다. 도시의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서정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
큼 많은 사고와 철학적 숙고가 동반되어야만 한다. 한 줄의 싯귀를 통해 인생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이 시
가 가진 장점인 것이다.
‘어느덧 세월이었다’라는 단정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시는 오랜 세월을 지나고 보니 어느덧 그많은 일들이
세월이라는 것으로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하나의 세월이라는 것으로, 너무 왈가왈부
하면서 살 일은 아니라는 함축이다. ‘눈과 귀를 이끌고 목마름에 서면’이라는 구절은 모든 욕망의 근원인 눈
과 귀를 이끌어 왔던 자신의 이성과 ‘갈망’으로 가득 찬 목마름을 생각해 보면이라고 살펴볼 수 있다. 인간
은 누구나 욕망의 노예처럼 무엇인가를 향해 목마름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을 뉘우쳐도 ‘빛’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절망하며 한 줄의 사라지는 문장의 연기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다. 지나온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시인은 이러한 연원이 전생이 아닌가 궁금하다. 그렇지만 전생도 현생도 감아올리지 못
하고 문장은 가라앉는 것이다.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생의 기저에는 허무주의가 있다. 결국 욕망이 있었으
나 사라지는 연기로, 한 줄의 문장으로 남을 뿐이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시인은 거침없이 말하고 있다.
이렇게 깊이 있는 시들은 생명력이 길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지속 가능한 시’에 속하는 것이다.
몇세대를 거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진화된 시여야 한다.
잊고자 누워 있던 바위에서 싹이 틉니다.
삶을 끊고자 버린 불모지에도 번뇌가 싹이 틉니다
내내 한 생각도 하지 않고자
오래 걸어온 길에
진을 친 거미줄이
아침마다 눈앞을 가립니다
떨쳐내고자 하여,
한 생각도 일어남이 없이
지극에 이를 수 있다던
경전의 말씀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노래한
긍휼로 남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청천같은 당신의 말씀은
하늘이 북새가 될 때에야
자취를 드러내었습니다.
덧없이 한 사람이 떠나고 나자
바람이 몹시 불었던 게지요
적멸에 들고자 하였던
멀리가지 못한 한 생각도
큰 바위 끝에 불콰한 빛깔로 남았습니다
-시인시각 2010년 여름호에서
위의 시는 불교적 상상력과 기독교적 상상력이 합하여진 작품이다. 성경의 잠언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
노래한 것과 불교에서 ‘적멸’이라 하여 고요함조차 다하였다는 의미가 나타난다. 사람의 욕망은 티끌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늘 욕망을 따라 살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 곧 사라지고야 말 헛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밤의 먼지’, ‘불볕에 사라지는 물기’, 곧 사라지는 ‘진을 친 거미줄’, ‘큰 바위 끝에 불콰한 빛깔’등은 곧
사라질 것들이다. 우리는 이렇게 가볍게 사라지고야 말 것들에 매달려 삶과 죽음을 오가며 손을 흔들어대
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한 생각도 일어남이 없이’ 떨쳐 내고자 하였으나 욕망을 버리지 못하므로 번민
에 싸이고야 만다. 버리고자 하였으나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시는 일면 깊은 진리를 내포하기도 한다. 깊은 진리는 철학과 더불어 시의 좋은 양분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지속 가능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도 이러한 인간의 고뇌와 진리가 엿보이는 것이 좋다.
시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때 그 시는 생명력이 긴 시로 진화한 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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